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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 『홍등의 골목』(2014, 온우주출판사) 수록작

 

 

나를 구원해주지 않아도 좋아  ― 전혜진, 「I love you」

 

 

 먼 미래, 혹은 그다지 머지않은 미래, 아이들은 이제 진화자궁을 통해 태어난다.[1] 우리의 주인공도 그렇다.[2] ‘슈슬리사’라고 하는 외계에서 온 고등생물체들이 지구에 나타난 후로 아이들은 모두 진화자궁을 통해 태어난다. 주인공 ‘나’는 진화자궁 2세대. 1세대로 태어난 아이들은 현재 부모 세대인 중년이 되었고, 막 태어난 아이들은 3세대로 불린다. 진화자궁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누가 누구의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는지, 그것은 아마 재료(유전자)가 지구의 인간으로부터 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흥미로운 SF 세계의 문을 여는 첫 페이지에서 ‘나’는 기꺼이 제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발을 닦고, ‘그녀’의 가장 더러운 일을 도맡는 종복이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이런 시대에 한 여자의 몸 안에서 아홉 달을 자라 세상에 나온 사람이다. 게다가 그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처럼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하니. 그녀는 광신자들에게 구세주로, 주님의 어린 양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이사나 빈트 마리얌. 직업은 군인이다. ‘나’는 집도 떠나, 이사나가 해군 장교로 근무하는 진해로 오게 되는데, 하도 좋다, 좋다 노래를 불렀던 탓인지 드디어 그녀가 ‘나’를 알게 되고, ‘나’가 일하는 카페를 찾아온다. 그리고…… 원래 이렇게 될 일이었는지, 만난 지 네 시간 만에 둘은 모텔이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사이, ‘나’는 혹시나 하고 ‘나랑 사귈래요?’ 용기를 내 보았지만, 이사나는 연애를 하기에는 군인인 본인의 조건이 나쁘다며 거절한다. 그러고는 두 달이 지나 이사나가 다시 ‘나’를 찾아와 같이 보낸 밤, ‘나’는 그녀에게, 자신에게는 ‘제대로 된 영혼이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자연출산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열 달 배 아파서 태어나지 못한 애들은, 장인정신 없이 대충 찍어낸 공장 물건 같은 거’라고 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사나의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나쁜 거네.”

 

 ‘나’가 애초 이사나라는 이름에 기대했던 것은 역시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영혼이 있는 사람, 어쩌면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이사나는 구세주가 아니다. 저토록 심플한 답은 구세주가 아닌 사람의 입에서라야 나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사나는 진짜 영혼을 가진 구세주로서 영혼이 없는 사람을 감싸주는 자비를 베풀거나 '나'를 사도로 삼지 않고, 단 한 문장을 말함으로써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혀온 말들을 부정한다.

 

 그녀 자신이 말하기로, 슈슬리나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사나의 어머니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것과 같은 현상이 드물게 진화자궁 초기 단계에 일어난다고 한다. 기적이라기보다는 돌연변이에 가까울 뿐인지도 모를 그 현상 덕분에 이사나는 일생 동안 지긋지긋하게 광신자들에게 구세주 운운을 들었는데, ‘나’와 모텔을 나선 어느 날에도 그런 광신자들이 나타나 ‘나’를 보고 구세주를 타락시키는 ‘음녀’라고 맹비난한다. 순간, 이사나는 당신들이 하는 말이 결국 당신들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죽으라는 뜻이 아니냐며, 내가 죽으면 당신들의 죄가 사해진다고 정말로 믿는 거냐며, 그렇다면 저를 쏴보라고 도발한 후 정말로 테이저건에 맞아 잠시 쓰러지고 말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생각한다. ‘그녀가 나의 죄를 사하지 않고, 그녀가 나의 죄를 대신 감당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녀를 위해 대신 죽어도 좋다고.’

 

 내가 당신을 믿는다, 숭배한다, 복종한다, 가 아니라, 제목처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가능한 것은 당신이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한낱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사나가 자신의 삶을 살기로 한 계기 또한 결국 자신이 구세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열다섯 어머니의 의지로 태어났음을 깨닫고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처럼. '구세주로 종종 오인받는' 이사나는 ‘나’에게, 1년에 3개월 정도만 볼 수 있는 '섹스머신 욕쟁이 군인'이다.

 

 

 

 

 

 

ⓒ지혜

fkvl0327@gmail.com


[1] 소설 내용과는 상관 없지만, 잠깐 신나 하고 가고 싶다. 진화자궁이라니! 정말 멋진 단어다! 이제 인간 여성은 출산의 고통도, 임신의 고통도, 가임기의 고통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2]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도 몰랐는데, 이 친구에게는 이름이 없다. 줄곧 ‘나’일 뿐이며,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혹시 보셨다면 제보해 주세요. 놓친 것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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