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무지개책갈피



ed0d6c332dfa94ec59afef3e84b80cb1.jpg

가쇼이, 『가발

어패류, 2017 (독립출판물)

 

 

 

  리뷰어의 기쁨: 좋은 책을 소개할 수 있다.

  리뷰어의 슬픔: 좋은 책을 제대로 소개할 능력이 부족하다.

 

  처음 20페이지로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확신하기까지 말이다. 책은 총 160페이지다. 나머지 7/8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내내 웃다가 찡하다가 무릎을 탁탁 쳤다. 그래서 쓴다. 능력 부족의 슬픔을 안고, 하지만 리뷰어만 품을 수 있는 기쁨을 악용하여, 가쇼이 <가발>을 소개한다. 이 리뷰는 여섯 글자로 요약된다. <가발> 읽으세요.

 

  퀴어 소설은 뭘까? 나도 모르겠다. 영원한 미스터리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퀴어 정체성(처럼 보이는 것)이나 퀴어 인물(처럼 보이는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를 퀴어 소설이라 칭한다. 하지만 영 썽에 차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모든 퀴어 소설이 퀴어한 것은 아니다. 퀴어 소설과 퀴어한 소설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겐 퀴어 소설만 너무 많아서,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퀴어한 소설이란 뭘까?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소설을 읽으면, 몇 만 개의 비누 사이에 파묻힌 기분이 된다. 인간은 규범 덩어리다. 규범은 신체를 구획삼아 빈틈없는 행정을 선보인다. 비누에 발을 담그기 전까지 내 몸 안에는 규범들이 꽉꽉 들어차있다. 그러다 비누 속에 빠진다. 나는 자꾸만 미끄러진다. 미끌미끌, 이러다 내 몸까지 다 허물어질 것처럼, 규범의 행정이 거품으로 사라질 것처럼 미끄러진다. 규범적인 인간으로서 제대로 땅 딛고 서지 못하게 하는 비누 같은 소설이, 나는 반갑고 좋다.

 

  <가발>은 아주 미끄럽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무무를 주인공으로, 이 소설에는 많은 살인과 섹스가 나온다. SF 판타지 스릴러라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이 아주 귀엽다. 인간을 집어삼키는 무무조차 귀엽다. 무무가 인간 행세를 하려고 뿔 같은 머리 방패와 커다란 다리들을 몸 안에 꾸역꾸역 넣는 것도 귀엽고, 여자는 이렇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는 인간들의 성별 규범을 비웃는 것도 귀엽고, 섹스와 식인을 번갈아 즐기는 모습도 귀엽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나는 무무가 만들어내는 비누 같은 세계에 가만히 몸을 맡긴다.

 

  내가 숲을 지나서 도시에 오고 이렇게 지하철을 탈 수 있으려면 단단하게 잘 구워진 쿠키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성별과 나이가 기입된) 날카로운 쿠키 틀로 나를 푹푹 찍어버려야 합니다. 여자 쿠키 또는 남자 쿠키가 되어야만 합니다. 여기는 바삭바삭한 쿠키를 위한 곳입니다. (80쪽)

 

  그들과 나의 차이점만을 부각해서 생각했을 때 이 과정은 훨씬 더 빠르고 쉬워집니다. 그들이 나와 같다면 나는 그들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나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면에서 다르다고 믿어버린다면 나는 그들을 먹을 수 있습니다. (98쪽)

 

  몇 부분만 인용해도 분명해진다. <가발>의 미끄러움은 영리함에서 나온다. 어디를 어떻게 문질러야 거품이 나오는지 작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이쯤 되면 프로 세신사다. 웃기고 귀엽고 영리한, 하지만 생각도 연민도 많은 외계인 무무는 말한다. 아주 정확하게 말한다. “규범은 거짓입니다.”(107쪽) 자, 그래서 다시 말합니다. <가발> 읽으세요. 같이 비누 속에서 헤엄칩시다.

 

 

 

보배

간만에 미끌거리는, 퀴어문학 마니아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공지] 리뷰어님들께 : 리뷰 업로드시 유의사항 무지개책갈피 2017.01.14
공지 [공지] 리뷰의 무단공유, 수정 및 도용을 금지합니다. file 무지개책갈피 2016.04.02
공지 [공지] 정기리뷰어 스케줄 secret 무지개책갈피 2015.08.14
154 신간리뷰: 불안한 세계 속 뚜렷한 가능성 - 강병융, 『손가락이 간질간질』 file 신난 2018.04.30
153 신간리뷰 : 혐오로 아름다움 드러내기 - 오스카와일드 < 텔레니> file 로미 2018.03.27
152 신간 리뷰 : 가끔은 달콤함에 빠져버려도 좋은 것 ─ 연홍, 『바게트와 마카롱』 file 지혜 2018.01.27
151 신간 리뷰 : 웰메이드 SF 리얼리즘 - 이종산 〈커스터머〉 file 다홍 2017.11.18
» 신간 리뷰 : 퀴어한 소설로 비누 목욕을 – 가쇼이 〈가발〉 file 보배 2017.11.03
149 신간 리뷰 : 불편러가 쏘아올린 작은 말 – 김혜진 〈딸에 대하여〉 1 file 보배 2017.10.06
148 신작 리뷰 : 별 것 아닌 동성애 -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file 다홍 2017.09.17
147 신작 리뷰 : 소비와 의심의 공동체 – 박민정 「아내들의 학교」 file 보배 2017.09.02
146 신간 리뷰 : 사랑의 재구성 - 퀴어 시선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다홍 2017.08.20
145 신간리뷰 : 사랑이라는 사인(死因)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file 보배 2017.08.05
144 신작리뷰 : 일기의 절벽 - 윤이형 「전환」 file 보배 2017.06.27
143 성숙한 사랑. _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똑똑한 마카롱씨 김늑대 2017.06.24
142 추억되는 사람 ― 한강, 「파란 돌」 file 지혜 2017.06.21
141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새라 워터스의 『게스트』 file 박복숭아 2017.06.11
140 지넷 윈터슨,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file 앨리 2017.06.07
139 _안느 브레스트, 완벽한 여자를 찾아서 김늑대 2017.05.20
138 나를 구원해주지 않아도 좋아 ― 전혜진, 「I love you」 file 지혜 2017.05.18
137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말을 아끼고 싶은 소설 1 file 너머 2017.05.17
136 미리암 프레슬러, 〈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 file 앨리 2017.05.12
135 '퀴어'는, '퀴어문학'은 지금 여기에 있다―HEN의 『소프트 보일드 키튼 1』 file 박복숭아 2017.05.0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

Copyright ⓒ 2015 무지개책갈피 All right reserved

메일주소: rainbowbookmark@hotmail.com / 트위터: @rainbowbookm
후원계좌: 국민은행 823701-04-291039 이보배(무지개책갈피)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