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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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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희 <황홀> (세계사/1999)

 

동성애 소재를 자주 다뤄온 이남희 소설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작품.

게이 주인공이 술에 취한 한 여자아이를 집에 데려오면서 벌어지는 일들과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약간 추리소설같은 형식도 흥미롭지만, 주인공이 게이란 사실을 소설 초입부터 유난스레 강조하지 않아 좋았고, 인물 개개인이 특별히 개성적이지는 않지만 서로를 비추고 겨냥하는 일종의 반사경 역할을 하면서 인물보다 관계가 더 구체적인 재밌는 경우입니다.

 

 

[본문 엿보기]

찬영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윤관수는 저편으로 가버렸다. 어깨를 늘어뜨린 뒷모습이 깊은 실망감을드러냈다. 찬영은 허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를 붙잡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허전함을 과장해서, 사랑한다고 너밖에는 소중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돌아올 것이다. 옆에 있어주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입안 가득 모래가 들어 있는 것처럼 서걱거렸다. 말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저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투어들을 자꾸 쌓아올리다 보면 결국은 자신의 전부를 내놓아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찬영은 그런 공식은 질릴 정도로 경험했었다. 이제는 그렇게 안되었다. (p.157)

 

한참이나 우리는 어슴푸레한 새벽빛 속에서 서로 얼싸안고 있었다. 욕정의 냄새는 없었다. 세상에서 외떨어진 두 명의 고아처럼 서로를 안아주고 있었을 뿐이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닐까?」

  이윽고 나는 신음했다. 그 아이는 대답 없이 여전히 내 등을 쓰다듬기만 했다.

  비로소 내가 갇혀 있음을 느꼈다. 최초의 선택조차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타고난 그대로 손발이 묶인 채로 살아갈 뿐이다. 자유도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이란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면서, 정반대의 영역에서, 정반대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뒤돌아보면 아득히 그런 느낌이 엄습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음의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은 황야들. 어느 사이엔가 그곳이 우리의 발걸음을 끌어당기며, 어느 순간 뜻하지 않게 그 황야에 자신이 머물러 있음을 깨닫고는 전율하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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