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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 <새벽의 나나> (문학과지성사/2010)

 

박형서 작가가 수 년 간의 태국 현지 취재 끝에 집필한, (퀴어·성노동자의) 당사자성이 가득한 장편소설.
『새벽의 나나』의 ‘나나’는 소설 제목이 주는 첫인상과 달리 인명, 즉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지명입니다. 방콕에 실재하는 ‘나나역’ 일대를 통틀어 ‘나나’라고 부르는데요. 이곳에는 태국에서 가장 번화했던 전설적인 사창가가 있습니다. 소설 『새벽의 나나』는 주로 바로 이곳, 집창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서사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평범한 한국 남자 ‘레오’는 여행길에 우연히 들른 태국에서 자신의 영적인 능력을 발견합니다. 바로 타인의 얼굴에서 전생을 보는 능력이죠. 이 능력으로 그는 전생의 아내를 알아보게 됩니다. 경유 시간을 떼우기 위해 찾은 싸구려 쌀국수집에서, 우연히 만난 태국의 성노동자. 그 낯선 이국의 얼굴에서 그는, 공주였던 그녀의 전생을 보고, 자신과 부부로서 나누었던 애착관계를 보고, 거듭되는 생의 굴레 아래 반복되는 사랑을 느낍니다. 그는 순식간에 그녀를 다시 사랑하게 되죠. 하지만 현생의 그녀는 이른 바 창녀입니다. 간밤 내내 열심히 일하느라 피로해진 얼굴로 쌀국수를 후후 불어먹는, 창녀입니다. 현생의 ‘레오’는 평범한 한국 남자일 뿐인데요. 성노동에 대한 낙인이 일반화된 한국사회에서 나고 자란, 그저 평범한 한국 남자말이죠. 이러한 그가 태국 최고의 성노동자를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성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함께 살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새벽의 나나』입니다.

 

이 소설의 재미는 ‘나나’ 일대에 모여 사는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에 있습니다. 열세 살부터 매춘을 배운 젊고 예쁜 1급 성노동자, 나이든 뒤 항문을 특화시켜 판매하는 성노동자, 트랜스젠더 성노동자, 마약상, 마약 중독자, 커튼 판매상, 에이즈 환자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나나’입니다. 이들은 성노동을 하고, 쌀국수를 먹고, 술을 마시고, 싸우다 다치고, 병에 걸리고, 그 와중에 아이를 낳아 보건소를 찾기도 합니다. 아이를 낳다 죽고, 죽어서도 나나를 떠나지 못해 유령으로 살아가기도 하죠. 주인공 ‘레오’는 이들을 애틋하거나 안쓰러운 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도 울고 웃고 화내면서, 또 함께 배고파하면서 그저 같이 살아가죠.

 

작가의 필력 덕에 몹시 재미있게 읽히지만, 마냥 쉽지는 않은 작품입니다. 어쩌면 독자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그의 시선을 통해 ‘나나’를 구석구석 들여다보게 되고, 집창촌에 대한 생생한 묘사에 거부감을 느끼다가도, 혐오와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그와 더불어 괴로워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바로 한국 사회 전반에, 그리고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잔재한―성노동자, 즉 창녀에 대한 혐오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서 매춘부로 살아보지 않은 자는 한 명도 없는 것이다.(p.340)’ 소설 속 한 문장입니다. 불교의 윤회 개념을 적용한 작중 인물의 독백인데, 어쩐지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집니다. 만약 생이 거듭되는 거라면, 우리는 모두 몇 번째 생에서인가 한번쯤은, 여자였을 수도 남자였을 수도, 귀족이었을 수도 부랑자였을 수도, 공주였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성노동자였을 수도 있겠네요(!). 우리 모두는 창녀로 살아본 적이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창녀입니다(!). 이는 작중 인물의 선언이기도 하고, 작품 『새벽의 나나』를 관통하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언뜻 황당한 논리로 읽히지만 작품을 읽다보면, ‘나나’의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거듭되는 전생과 현생의 이야기들을 헤아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장입니다. 비단 성노동자뿐만 아니라 퀴어·장애인 등 여러 소수자 문제에 적용해볼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하고요. 풀기 힘든 혐오의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인식론을 제시하는 이 작품―몹시 무책임하지만 자신있게 추천드립니다.

 

 

[본문 엿보기]

거울 앞에 서서 눈 깜빡임을 연습하는 와중에도 레오가 가장 많이 지껄인 말은 ‘플로이는 창녀야’였다. 그 짧고 퉁명스러운 말 속에는 창녀라는 경멸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제가 처한 상황을 환기시키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한편으로 이는 또한 그만큼 깊숙이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 말을 지껄이고 나서 레오는 매번 이렇게 뒤를 이었다.
그래도 플로이는 좋은 창녀야.(p.54)

 

잠깐, 하고 레오가 말했다. "내가 위선자라는 거야? 그래서 플로이가 나를 싫어한다고?"
"아니, 네가 너무 도덕적이라는 말이야. 너는 아직 플로이를 용서하지 못하잖아."
(…)
"레오, 전생에 공주였던 매춘부의 오늘만큼, 전생에 매춘부였던 공주의 오늘을 슬퍼할 수 있겠어?"(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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