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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트랜스와 시스의 이분법을 넘어 - SF 속 트랜스젠더를 묻다: 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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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리뷰팀 댓글 0건 작성일 2025-09-29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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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양면의 조개껍데기」(『양면의 조개껍데기』, 2025, 래빗홀)



#트랜스젠더 #공상과학 #트랜스남성 #젠더문학 #젠더디스포리아






최근 한국 퀴어 문학에서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 SF적 상상력은 어떻게 트랜스적 경험을 서사화할 수 있는가. 이 글은 두 가지 질문에서 시작된다. 김초엽의 단편소설 양면의 조개껍데기[1]는 외계 행성에서 같은 몸에 두 자아로 살아가면서 갈등을 겪는 샐리(라임)과 레몬, 그리고 그들의 연인 경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은유적으로 트랜스성을 읽어낼 수 있는 사이보그 서사나 젠더 교란을 암시하는 전환의 서사는 SF에서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트랜스의 삶과 직접 맞닿아 있는 SF 작품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소설은 트랜스 남성적 욕망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고 젠더 디스포리아를 서사의 중심으로 끌고 온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가진다. 이 글은 작품이 흔히 재현되는잘못된 몸서사를 반복하는지, 혹은 인물 간 관계를 통해 시스와 트랜스의 경계를 흐리는 문학적 상상력을 제공하는지를 살펴본다. 더 나아가 트랜스 문학에서 당사자성과 위치성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도 함께 논의하고자 한다.

 


전환과 분리: 트랜스 혐오와 잘못된 몸


셀븐인 샐리는 타자아인 레몬과 정신 분리 시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방문한다. 지구인 의사는 루피너스 행성계에는 시술을 도울 셀븐인 의사가 없다며 시술의 부작용에 대해 경고한다. “54퍼센트가 후회하고그중 10퍼센트는 다시 예전으로 되돌리는 통합 시술을 시도하는 의사의무시무시한 설명에도 불과하고 샐리는 시술 동의서를 작성하려고 하지만 그때그만둬라며 레몬의 목소리가 개입한다(203).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샐리는 진료실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것인지 레몬의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정신건강센터에서 의료인과의 상담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장면은 트랜스적으로 읽힌다. 여전히 정신과 진단이 있어야 호르몬 치료와 성확정 수술에 접근이 용이한 한국의 상황에서꼭 시술만이 답이 아니다”(201)라며 샐리를 말리는 의사의 말은 트랜스의 욕망을 부정하려 하는 의료 권력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점점 레몬과의 의식 전환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샐리는 절실히 분리 시술을 원한다. 작품에서전환은 셀븐인이 태어날 때 가지는 신경 구조 때문에 생기는 다른 자아들이서로에게 의식을 바통 터치하듯 넘기는일을 가리킨다. 그러나서로 다른 자아들을 조화롭게 잘 다루며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행성 셀븐과 달리 지구에서는 그런 공존에 대해 배울 수 없다(218).

물론 이 작품에서는 트랜스가 비유적으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소설에 상술되듯이, 레몬은여성의 신체를 불편해하고 여성으로 지정된 신체에게 부과되는여성적인특징들에 큰 불쾌감을 느끼는 명확한 트랜스젠더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나중에야 레몬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그 애는 열두 살 때 처음 샐리에게 말을 건다. “제발 그 멍청한 모양의 원피스는 입지 마. 내가 그걸 입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니까.” (215) 이 소설의 트랜스젠더적 서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비트랜스/시스젠더가 받아들이는 몸과 트랜스젠더가 느끼는 몸에 대한 불편감 사이의 괴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내가 표면에 있을 때와 그 애가 표면에 있을 때의 감각은 확연히 달랐다. 내가 의식을 지배하고 몸을 움직일 때, 나는 한 번도 그것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몸의 근육과 신경 하나하나가 나에게 속해 있었고, 나의 신체는 정신과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애가 표면으로 올라가면 무언가 달랐다. 그 애는 몸을 불편해했다. 그 감정이나 느낌이 정확히 말로 옮겨진 건 한참 뒤의 일이었지만, 내가 의식 아래로 내려왔을 때 나는 그 애가 몸을 마치 역겨워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애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애는 몸을 직접 움직이거나 감각할 때보다 의식 아래에 있는 것을 편안해했다.”(217)

젠더 디스포리아를 위와 같이 표현해내는 부분은 이 작품을 트랜스적으로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개의 자아를 가진다는 설정 때문에 독자는 트랜스젠더가 호소하는 불편감을 직접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화자의 샐리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자라면서 샐리는몸에 나타나는 여성적인 특징들을 싫어”(218)하는 이 감각에 대해 더 분명하게 알게 된다. 주목할 점은 샐리가백번 양보해 그 애가 내 몸에 달린 가슴과 엉덩이를 질색하는 것까지는이해하지만조금이라도 나풀거리는 옷을 입거나 예쁜 장식품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불평하는것과여자애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태도는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218-219). 이러한 생각은 흔히 나타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몰이해와 맞닿아 있다. 비당사자에게 트랜스젠더의 주요 감각 중 하나인 성별 불쾌감(젠더 디스포리아)을 설명할 때는, 흔히 신체 자체에 대한 불쾌감과 (여성성/남성성에 부여되는) 성역할에 대한 불편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나누어 설명한다. 전자인 여성으로 지정받은 신체, 그리고 특히 성애화되는가슴과 엉덩이를 불편해하는 트랜스(남성)적 욕망은 때로 이해할 만하다고 여겨진다. 신체에 혐오감을 느끼는 일은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맥락이다. 그러나 후자인 옷이나 화장 같은여성적인 성별 표현이나 행동가짐을 불편해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민감함으로 쉽게 치부된다. 샐리는 레몬과 몸을 공유하기 때문에 신체적 불쾌감은 쉽게 이해하지만, 사회적 관념에 기댄 욕망은 이해하지 못한다.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는 SF 세계관 속에서, 작품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진다면 트랜스의 신체 불쾌감은 여전히 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샐리는 어른이 되자마자 지구를 떠나고, 그러자 그들을 향한정형화된 역할에 대한 기대도 흐릿해”(219)진다. 그러나대뜸 성별을 묻거나 외견으로 특정한 행동 양식을 추측하는 일도 드물어졌음에도 레몬이 가지는어떤 근본적인 불일치의 감각,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는다(220). 레몬의 감각은 샐리에게 흘러 들어가고 그래서 샐리는 더욱더 분리 시술을 원하게 된다. 한편 트랜스젠더의 성() 불쾌감이 사회적 인식에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불편감에서 온다는 논리는 트랜스혐오적 담론과 맞닿아 있다. 태어났을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로 표현을 추구하는 트랜스젠더는 여성성/남성성에 대한 편견에 갇혀 잘못된 욕망을 가지는 것이라는 흔한 혐오를 겪는다. 예컨대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고 싶어하는 트랜스 여성에게 당신은 여성성에 대한 편협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혐오의 양상이다.

그렇기에 트랜스 당사자들은 자주 자신에게는더 근원적인불편감이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여성과 남성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만으로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견디기 너무 힘든 고통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혐오에 대항하려는 이 논리는 쉽게 본질주의로 회귀한다. 마치 셀븐인이 태어날 때부터 두 개의 자아를 가지는 것처럼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도 가지고 태어나는어쩔 수 없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는 구별된다는 구도이다. 이는 트랜스젠더가 흔히 문제적으로 재현되는 양식인못된 몸서사와도 연결된다. 트랜스 여성을남성의 몸에 갇혀 태어난 여성으로 이해하는 이 방식은 남성의 신체와 여성의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구획하고, 생물학적 신체를 절대불변의 과학적 사실로 전제하는 믿음을 강화한다.

샐리와 타자아 레몬은 일견 잘못된 몸 서사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레몬은 샐리의 몸에 갇혀여성의 신체에 대한 근원적인 불편감을 없앨 수 없다. 다만 소설에서는 한 몸 속 두 개의 자아인 외계인이라는 SF적 설정 때문에 오히려 시스와 트랜스의 관점 사이 경계가 흐려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존재는 같은 몸에서 분리되지 않았기에, 다이버로 일하고 또 그 과정에서 만난 촬영감독 류경아와 비독점적 연인 관계를 맺으면서 전환을 이어가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샐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레몬이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애의 괴로움은 샐리에게도 흘러들어와 감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류경아는 첫 만남에 샐리에게 두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A와 샐리B를 구별해내고 각 자아에게 라임과 레몬이라는 애칭을 붙여준 사람도 경아이다. 경아는 두 자아를 개별적 존재로 사랑한다. 하지만 레몬은 젠더 디스포리아 외에도 관계적 혼란을 계속 경험한다.

류경아는 여성을 사랑하는 건가? 레몬 자신이 스스로를 남성으로 여기는 상황에서도 관계는 지속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상황에도 레몬은 여성의 신체를 가졌고, 그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타자아가 존재하는데, 류경아는 이걸 어떻게 생각할까? 레몬이 의식을 점령할 때면 그 복잡한 고민들은 단지 심리적 고통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신체적인 고통을 유발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불안, 우울감, 무기력, 공포가 무의식에 숨어 있던 나를 끄집어 올려 맨 바닥에 내팽개치는 것 같았다.”(226-227)

이런 불안을 못 이겨 레몬이 일방적으로 류경아와 헤어지고 온 사건은인 샐리가 레몬을 불신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상황이 수습되기는 했지만 샐리는 분리 시술을 결정한다. 레몬에게 계속 그 결정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만 레몬은 자꾸만 말을 줄인다. 의사로부터 시술 전 한 달 동안 복용해야 하는통합-정신조절제를 처방받고 류경아에게도 시술 소식을 알린 뒤 둘은 루피너스 바다를 촬영하는 다이버 일을 계속하며 기다린다. 언제나처럼 샐리는 얕은 수심, 레몬은 깊은 바다 속에서 각각의 영역을 헤엄친다. 샐리와 레몬은 분리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트랜스의 불안은 시스성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있을까? 트랜스젠더의 경험이 고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은 트랜스 공동체에게 중요하다.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겪는 문제를 시스젠더에게서 분리해 내는 것은 시스젠더라는 허구의 대립항을 더 강화한다. 시스는 정상으로 트랜스는 예외로 위치된다. 트랜스는 더 다양하게 사유될 수 있다. 만약 류경아와의 관계가 소설 속에서 더 자세히 등장한다면 트랜스젠더의 관계맺기에 대해서도 더 펼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레즈비언과 게이 정체성을 이해할 때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 체계가 질문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면 트랜스젠더는 퀴어 관계맺기의 경계를 흐리고 다원화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문학 속 사고실험에 기대어 다른 트랜스적 사유를 상상하게 된다. 레몬은 곧 샐리이고 샐리 안에는 레몬이 있기 때문에 트랜스와 시스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레몬은 샐리 안에, 샐리는 레몬 속에 있다. 트랜스와 시스의 경계는 그들의 호흡처럼 얽히며, 그 얽힘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들이 흘러나온다.

 


문득 혼란스러워질: 시스와 트랜스 사이


소설은 초점화자인’, 즉 샐리의 시선을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에 독자는 레몬의 생각을 들을 수는 있지만 때론 샐리처럼그 애의 흘러 넘치는 생각을 느낄 수 없”(234). 샐리는 안정제를 계속 복용하지만 레몬이 시술에 완전히 동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레몬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샐리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자신도 이 삶의 일부이고 샐리를 함께 이루고 있는 자아라고. 이런 상황을 트랜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시스의 관점으로 읽어야 할까? 트랜스만의 고유한 고통이 존재하고 시스는 그렇게 태어나지 않아 이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샐리와 레몬은 한 몸이다. 그럼에도 뚜렷이 구분되는 욕망을 가진다. 샐리는 생각한다. “레몬과 나의 불행은 우리가 독립적 개체일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친구일 수도 가족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관계들은, 모두 개별 개체에 깃든 독립적 자아를 가정하는 지구에서 생겨난 것들이니까.”(231) 그렇기에 샐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은 분리이다.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독립적인 자아로 살아갈 수 있도록.

평소처럼 다이버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샐리와 류경아는 큰 충돌사고를 당하고 레몬은 류경아를 살리기 위해 강제 의식 전환을 시도한다. 류경아는 구조되지만 샐리가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레몬은 사라진다. 강제 전환을 하면서 문제가 생겨 레몬은 무의식 깊은 곳으로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레몬과 분리되고 싶었지만 샐리는 후련하지 않고 자신이 자신을 떠나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퇴원 후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섰을 때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레몬은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 더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관찰했기 때문에 샐리도 때로는 바깥에서 자신을 지켜보게 되었다. 하지만 레몬이 떠난 지금, 샐리는 자신의 몸에서 문득 이질감을 느낀다. “왜 이 몸은, 이런 근육과 뼈를 지녔을까. 가슴이 여기에 붙어 있는 것이, 몸이 이런 형태의 굴곡을 이루는 것이, 전부 어색했다.”(240) 그러면서 샐리는 곰곰이 생각한다. 왜 레몬이 바다 깊은 곳을 더 편안해했을지.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고 어떤 존재인지 신경쓰지 않고 왜 너는 그런 존재냐고 묻지 않는 곳이라서 그래서였을 것이라며 레몬을 이해하게 된다.

샐리는 셀븐인이라서, 레몬이 타자아이기 때문에 트랜스적 경험을 이해하게 된 것일까? 이런 SF적 설정이 없는 세상에서 시스는 트랜스를 이해할 수 없을까? 트랜스젠더의 감각과 삶을 바라볼 때 고유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트랜스 공동체와 트랜스혐오적 사회를 헤쳐나가야 하는 트랜스 개인에게 절실하다. 항상 부정당하고 멸시받아온 트랜스 당사자는 시스젠더들이 지긋지긋하다. 그러나 그만큼 트랜스의 경험이 단일하고 이분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트랜스를 시스와 분리해내려는 시도는, 결국 비트랜스=시스라는 공식을 굳히고 경계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샐리라는 인물을 읽어내며, 논바이너리 당사자로서 생각한다. 어느날 갑자기 몸에서 문득 이질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트랜스젠더가 지정된 성별과 본인이 느끼고 경험하는 성별(젠더) 사이 괴리감 또는 불쾌감을 가지는 정체성으로 정의된다면, 시스젠더는 어쩌면 그 불편함을 질문하지 않는 상태 그 자체이다. 질문이 부재한 상태일 뿐이지, 영원히 질문되지 않는 상태는 아니다.

레즈, 게이, 바이와 같은 성적 지향은 관계적이다. 하지만 성 정체성(젠더 정체성)은 나와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도 중요하지만 나(또는 내 정신)와 내 몸이 맺는 관계에 대한 방식이다. 데카르트식 정신-신체 이분법에서 벗어난다면 나와 남들이 읽어내는 나 사이의 방식은 질문되지 않은 회색 영역에 머무르기 쉽다.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은 흔히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괄호에 갇힌 시스젠더 레즈, 게이, 바이(LGB), 그리고 트랜스젠더(T)사이에는 대립과 긴장이 생긴다.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 만연한 트랜스 혐오와 같이 분리주의가 생겨난다. 하지만 호모-게이와 트랜스 여성 사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부치와 트랜스 남성됨이 맞닿아 있듯이 퀴어함은 언제나 트랜스함을 품고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가 퀴어라면 퀴어 커뮤니티의 시스젠더중심주의는 더 논의되어야 한다. 동성 간 사랑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해 왔지만동성애(homosexuality)”가 과학적으로 정의되고 병리화되면서 그 대립항인이성애(heterosexuality)”는 공고한 이데올로기가 된다. 트랜스 학자 카지 아민(Kadji Amin)은 이와 비슷하게 시스성 역시 트랜스의 대립항으로서만 존재하는 허구라고 생각한다.[2] 시스젠더중심성을 경계하는 일은 트랜스의 생존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 이분법을 공고히 하기보다 무엇이 시스성을 만들어내는지 질문해야 한다.

김초엽이 제시하는 샐리와 경아의 이야기는 시스와 트랜스 사이 경계를 흐려준다. 현실에서 두 자아 사이 대화와 의식 전환이 불가능하더라 할지라도 문학은 읽어내기 어려웠던 현실의 문제를 가시화한다. 작품 후반부에서 레몬은 의식을 회복한다. 레몬을 계속 기다리던 샐리는 정신분리 시술을 진행하지 않기로 한다. 다시 다이버 일을 하며, 샐리가 레몬에게 의식을 여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의식 위에 있는 레몬에게 나의 감각을 모두 맡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애의 세계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조금씩 혼란스러워서, 나는 레몬에게 휩쓸리는 것을 늘 두려워했다.

           처음으로 온전히 개방한 나의 자아 안쪽으로 레몬의 세계가 파고든다.

           그 세계는 잔잔한 슬픔과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반짝이는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세계의           슬프고 반짝이는 것들이 나에게로 건너오기를 기다린다(244-245).

시스는 정말 트랜스를 이해할 수 없을까. 트랜스의 고통은 고유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어떤 반짝이는 가능성이 있을지 아직 질문하지 않았을 뿐일까. 시스의 선을 흐릿하게 만들면 슬프지만 반짝이는 트랜스의 세계를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른다. 샐리가 레몬의 세계를 기다리는 것처럼. 시스와 트랜스의 경계는 고정되지 않았고 서로를 비추며 흔들린다. “그 세계에게서 결코 분리되지 않고 흘러들어온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그 잔잔한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반짝임을 마주하며 질문을 시작하길 바란다.

 


트랜스 문학의 지평을 넓혀


마지막으로 한국 문학장에서 트랜스(젠더)문학을 어떻게 논하고 비평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단상을 짧게 남긴다. 현재 문단에서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며 글을 쓰는 작가는 극히 드물다. 물론 제도권 문학을 넘어 웹툰, 웹소설, 영화, 유튜브, SNS툰 속 트랜스 서사로 매체의 범위를 넓힌다면 이는 완전히 다른 논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사자가 아닌 작가가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서사화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엄밀히 말해 김초엽 작가가 시스젠더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지 않았다면 시스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비트랜스가 트랜스젠더의 젠더 디스포리아를 이해해보기 위해 창작한 것이라고 봐야 할까. 이 단편은 큐큐 독립 출판에서 2018년부터 6년간 출간했던 퀴어단편선 시리즈 중 2021『팔꿈치를 주세요』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먼저 설정하고 일정 부분 이 정체성을 의미 있게 풀어내기 위한 시도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동시에 퀴어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의 정체성이나 집필 의도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당사자성과 위치성 논의보다도 작품에서 느껴지는 퀴어 프렌들리함이 중요하다.

비당사자가 퀴어 정체성을 곡해하고 문제적 서사를 써내는 일은 너무 흔해서 트랜스젠더 서사를 읽어낼 때면 항상 경계하게 되고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논바이너리 당사자로서 나에게 와닿지 않은 트랜스 서사가 너무 많다. 그러나 이 단편을 읽고 난 다음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작가의 애정이 느껴진다. 샐리와 레몬의 관계에 대한 애틋함의 정동이 남아 자꾸만 그 세계의 슬프고 반짝이는 것들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샐리가 레몬을 이해하게 된 만큼, 이 서사는 시스와 트랜스 사이 경계를 흐리고 시스성이 무엇이었는지 질문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이 이분법적이지 않은 서사가 가지는 힘이 무엇일지는 더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한국문학에서 검토해야 할 흥미로운 꼭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북미 문학계에서는 최근 번역되어 인기를 끌었던 『디트랜지션, 베이비』와 같이 트랜스 여성 당사자가 작가로서 내밀한 트랜스 공동체의 이야기를 리얼리즘적으로 조명하는 소설 계보가 풍부하게 구축되어 있다. 한편 한국문학에서는 김비 작가가 대표적으로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트랜스 자기이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소설을 써왔다. 이 두 흐름을 넘어, 트랜스 문학의 지평은 더욱 확장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김초엽 작가는 인터뷰와 책에서 본인이 청각장애 당사자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의 다른 SF 단편을 살펴보면 사이보그적 신체와 정상성에 관심을 가지고 문학을 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퀴어 이론가들은 일찍이 장애학과 트랜스학이 상호보완적으로 이론화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주장해 왔다. 특히 푸아(Puar)와 같은 이론가들은 트랜스규범성(transnormativity)을 논하며 국가적, 의료적, 자본주의적 규범에 들어맞는 백인, 중산층, 비장애 트랜스젠더 당사자들만 신자유주의적 국가 아래에서 정상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비판한다. 보다 게토화되고, 가난하며, 인종화되고, 장애를 가진 트랜스의 삶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언제나 배제되며, 트랜지션 관련 의료 서비스나 차별금지법의 보호에서도 제외된다.[3]

트랜스 의료 접근성과 차별금지법의 상황이 상이한 미국의 이론을 그대로 끌어올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트랜스와 장애는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의료적으로 치료 가능하다고 믿는 관점이 장애에 대한 병리적 관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푸아는 정체성 기반 사회적 통합(inclusion)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예컨대 트랜스젠더도 군대에 복무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국가주의, 군사주의, 식민주의와 연루된 폭력을 충분히 비판해내지 못하고 어떤 트랜스가 어떤 조건에서 배제되는지 설명해내지 못한다. 트랜스젠더도 당연히 똑같은 권리를 누려야 마땅하지만, 단순히 시민으로 인정받는 일만으로는 구조를 비판할 수 없다.

트랜스규범성을 경계하는 일도 필요하고 문제적 트랜스젠더 서사는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무엇보다 한국 문학장에서 트랜스젠더 서사가 더 많이 호명되기를 바란다. 어떤 경계를 흔들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논의하고 도전하고 재정의해야 한다. 그렇기에 퀴어-트랜스 문학에서 당사자라는 위치성을 더 넓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제안한다. 김초엽 작가가 트랜스 당사자가 아닐지라도 그가 장애 당사자로서 가지는 문제의식은 트랜스젠더의 신체성과 맞닿아 있다. 트랜스 문학은 당사자성에만 매몰되지 않고 트랜스 위치성과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더 넓게 이해될 수 있다. 김봉곤과 박상영 작가의 게이 서사가 이끈 퀴어 문학의 대중화와 최근 레즈비언 인물이 과대 표상되는 퀴어 문학장의 맥락에서, 우리는 트랜스함을 더 적극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트랜스젠더 정체성뿐 아니라 젠더와 섹슈얼리티 규범과 불화하는 가로지름의 트랜스성에 더 초점을 맞춘다면 트랜스 문학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현세대의 조건과 규범을 비틀어 다른 세계관을 제시하는 SF문학에서 우리가 슬프고 반짝이는 트랜스의 가능성을 더 많이 읽어내길 기대해 본다.



[1] 김초엽 외 『팔꿈치를 주세요』, 큐큐퀴어출판 2021.

[2] 카지 아민, 「우리는 모두 논바이너리다: 간략히 살펴보는 우연의 역사」, 『여/성이론』 49, 여이연, 2024, 166 – 188.  

[3] Jasbir K. Puar, “Bodies with New Organs: Becoming Trans, Becoming Disabled,” Social Text 124, 2015, p. 4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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