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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지니, 2015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세 명의 가족이 160층짜리 백화점의 비상계단에 갇힌 상황으로 시작한다. 이 비상계단은 어딘가 이상하고, 섬뜩하고, 공포스럽다. 으레 있어야 할 층수 표시가 없고, 비상계단의 문은 단 한 층도 열리지 않으며, 붉은색 비상표시등은 온 공간을 불길한 붉은색으로 채운다.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이들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비상계단에 들어가지 말라고 쳐져 있는 빨간 띠를 넘어 들어왔다. 또한 모두 정확히 몇 층에서 계단으로 들어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오륙 층, 아마 지하 3-4층, 십몇 층, 몇 층에서 두어 층 내려왔는데, 그런 식이다. 아무도 여기가 어디인지, 몇 층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모두 층수 표시도 없는 비상계단을 헤맨다. 1층에서 구출을 한다는 방송을 듣고 내려갔다가, 사실 진짜 ‘구해야 할’ 사람들은 옥상에서 구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올라가거나.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없고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는, 그 자체가 복잡하게 꼬인 미로이며 하나의 세계인 것 같은 비상계단에 모두 갈 곳을 잃고 서 있다. 그 곳에 주인공의 어린 아들 환이가 크레파스를 들고 그림을 그린다. 물고기를, 전부 서로 다른 물고기를 열심히 그린다. 사람들은 이제 환이가 그리는 물고기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고, 환이가 적는 숫자로 새롭게 층수를 센다. 과거의 기억에 의지해 세상의 기준을 맞히려던 사람들이, 틀릴지언정 그들의 기준을 정립하고 계단을 오른다.

 

  이 소설의 내용이 현실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책에서 현실성을 찾지 않기를 바란다. 소설 안에서의 개연성은 있지만, 당장 일어날 것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현실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소설은 허구이고, 진실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장르니까. 누가 봐도 현실적이지 않은 요소로 주인공의 현실과 독자인 나의 현실까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매력이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이만 말을 줄인다. 결말을 말하지 않겠다.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을 아끼고 싶으며, 읽은 사람과는 열띤 토론을 벌이고 싶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무한히 달라지는 해석의 방향을 모두 알고 싶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이 가지고 있는 상징이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고, 해석에 따라 주제마저도 달라질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문단을 소개한다.

 

  그러고 보니, 삶에는 이유가 없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에게 삶은 오기였다. 승리하고 이겨내려는 집념이 아니라, 제자리에 꼼짝 않고 버틴 채 서 있기 위한 아집이었다. 여러 가지 지상의 말들로 화려하게 이름 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는 그것이 시간의 수레를 가로막은 사마귀의 몸짓임을 알고 있었다. 거대한 바퀴에 몸통이 짓눌려 질질 끌려가면서도, 어디까지 갈 테냐 끝까지 시간에 매달리는 발버둥. (52쪽)

 

 

 

 

너머

손이 느리고 생각이 많습니다.


?
  • 너머 2017.05.17 05:53
    그러나 제가 느끼기로는 대단히 막막한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감돌았기 때문에 그게 싫으신 분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동학대가 트리거인 분도 읽는다는 선택을 재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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