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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는, '퀴어문학'은 지금 여기에 있다―HEN의 『소프트 보일드 키튼 1』

 

박복숭아

 

 

 

 

 

『소프트 보일드 키튼 1』은 여러모로 특이한 작품이다. 일단 책의 제목부터 내세우고 있는 것은 '소프트보일드' 장르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이 장르는 남성 중심의 서사이자 냉철하고 이성적인 문체를 특징으로 갖고 있는 '하드보일드'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탐정 및 수사물의 기본 공식을 밟아 나아가되 보다 감성적인 묘사 기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소프트보일드' 장르를 표방하는 동시에 여성 퀴어 서사까지 담고 있다. 『소프트 보일드 키튼 1』은 출간에 앞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을 통해 후원을 받았는데, 출판사인 큐블리셔는 이 책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소프트 보일드 키튼> 속에는 여성간의 연대와 사랑이 있습니다. '소프트 보일드'라는 제목의 의미답게 두 사람은 사건을 해결하며 마주하는 모든 순간 순간 냉소적이기 보다는 끝 없이 아파하고, 한 없이 공감하며, 또 최선을 다해 서로를 지지해 줍니다. 거대한 사회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마치 만화 속 주인공 같은 그들이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결국 '언젠가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아질까 두려워하는 마음' 뿐입니다. 그들은 만화 속 인물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우리들의 얼굴입니다.1)

 

때문에 『소프트 보일드 키튼』 속 모든 인칭대명사는 '그'로 통일되어 있으며, 성차별적인 언동도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주인공인 '재인'은 보험사 특수조사팀 소속 보험조사원이라는 다소 특이한 직종을 가지고 있지만 등장하는 인물 그 누구도 그가 여성이라는 점을 문제삼지 않는다. 이는 '재인'의 조력자인 '은영'에게도 해당된다. '은영' 역시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팀에 소속되어 있는 형사이며, 성별을 이유로 활동에 제약을 받거나 하는 일도 없다. 둘은 자신들 앞에 놓여진 사건을 차근차근 해결하는 데 집중할 뿐이다.

 

『소프트 보일드 키튼』은 「프리-프락」과 「베르겔츠 고트」, 그리고 「더 로드킬러」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작소설집이다. 첫 장인 「프리-프락」에서는 부딪쳐서 서류를 쏟는, 다소 클리셰적인 만남을 통해 두 주요 인물인 '재인'과 '은영'이 만나게 되며 두 번째 장인 「베르겔츠 고트」에서는 본격적으로 연대하며 서로 간의 신뢰를 형성하게 된다. 

 

"죽진 말아요, 우리."

은영이 말한 '우리'라는 단어에 재인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정 좀 붙이자고 채근하던 첫 사건 때에 비해 서로 간에 신뢰라는 게 조금 생긴 것도 같았다.2)


"황 형사님, 저 이 일 계속 해도 되는 걸까요?"

"……척 보면 안다면서요."

아 모르겠어요! 척 봐도 모르겠어! 재인이 투정을 부리듯 발을 좀 구르고는, 이내 피식 웃으며 은영 쪽을 올려다봤다. 경찰청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저 여자, 좀 멋있네. (…중략…)

"잘 하세요."

"그래요…?"

"네. 경찰이셨으면 같이 일하고 싶을 만큼."3)

 

또한 사건이 진행될 때마다 둘은 신뢰뿐 아니라 애정도 천천히 쌓아가게 된다. 『소프트 보일드 키튼 1』에는 대놓고 드러나 있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술과 묘사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우정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 놀리듯 웃어 보인 은영이 이내 그 웃음 그대로 어서 가시라고 손을 흔들어 준다. 저렇게 웃어 보이면 또 참 화사한 사람이란 말이지. 자주 좀 웃어주면 좋겠지만 그의 직업이 그걸 허락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인은 경찰청을 벗어나며 살짝 웃었다. 둘이서 무슨 야유회인지 조금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간만에 입에 담아보는 '야유회' 세 글자가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설렌 것 같기도 하고. 경찰청 주차장으로 오라는 걸 보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걸 텐데, 뭘까. 서울을 벗어나 멀리 경승지에 돗자리 펴놓고 술 마시는 야유회를 말하는 건 아닐 거다. 그냥 장난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황 형사가 장난도 칠 줄 알았던가? 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또 이걸 뭘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까.

아무튼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황 형사, 가끔 저렇게, 가뭄에 콩 나듯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니까. 재인은 마침내 그냥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버리기로 했다.4)

 

나 황 형사님이랑…… 그, 야유회 가고 싶단 말이에요. 꼴랑 둘이서 가는 게 야유회인지 그건 확실하지 않지만…… 재인은 더듬더듬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은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재킷을 집어 들어 툭툭 털더니 이내 그대로 사무실을 향해 발을 옮겨버릴 뿐이었다. 진짜 너무하네. 재인은 우거지상을 하곤 박하사탕을 아그작 씹어 먹었다.

"토요일."

그런데 그대로 쓱 사무실 안에 들어가 버리는가 싶던 은영이 문득 돌아서 재인을 바라보았다.

"네?"

"이번 주 토요일, 비번이라고요."

그리곤 다시 미련 없이 닫히는 문.

여름에 처음 왔을 때 그렇게 야속했던 저 지능범죄수사4팀의 문이 닫히는데도, 재인은 어쩐지 하나도 야속하지 않았다. 황 형사님! 재인은 그렇게 다시 한 번 그를 붙잡았다. 천천히 문틈으로 저를 돌아보는 은영을 향해 재인은 불쑥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꼭 가기로, 약속! 나 새끼손가락 거는 거 좋아한다니까요."

물끄러미 재인을 보던 은영이 또 피식, 코웃음을 치며 재인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어주었다. 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청에서 이게 무슨 새끼손가락 꼭꼭 걸고 약속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말없이 빙긋 미소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마주 닿은 그 눈빛에 모두 담겨있었다. 재인은 가뿐한 마음으로 경찰청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청량한 박하사탕의 향이 목구멍을 시원하게 휘감았다. 요 며칠 무엇에서도 느끼지 못해 잊고 살았던 이 시원한 느낌에 재인은 속이 다 뻥 뚫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박하사탕 같은 사람. 재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경찰청을 나섰다. 제멋대로 기지개를 한 번 쭉 켜본다.

경찰청 건물을 등지고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뒤를 돌아 은영이 있을 그곳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재인은 이번엔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겨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재인은 문득, 정말 문득,

지금 이 순간 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5)

 

『소프트 보일드 키튼 1』을 두고 누군가는 '백합물'이라 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걸크러쉬 문학', 다른 누군가는 '워맨스물'이라고 말할것이며 어떤 사람은 '레즈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일반 대중들이 여성 퀴어 서사를 칭하는 단어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얄팍한 단어들의 남용 속에서 실제 존재하는 퀴어들의 삶들은 가려지고, 가볍게 소비되어 마침내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얼마 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공개 토론회에서 한 대통령 후보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발언을 했다. 그에 맞서 여성 후보가 1분의 찬스 발언 시간을 할애하여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대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본다. 성 정체성은 말 그대로 정체성이다. 저는 이성애자지만 성소수자들의 인권과 또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다. 동성애 반대 발언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후, 토론회가 끝나고 다음날 오전까지 그 후보의 후원 계좌에는 일억 원의 후원금이 입금되었다고 한다. 일억 원이라는 돈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존재가 지워진 퀴어들의 '우리는 여기에 있다'는 외침이었다.

 

어떠한 용어가 사용될지라도 『소프트 보일드 키튼 1』은 퀴어문학이다. '백합물'도 '레즈물'도 '걸크러쉬 문학'도 '워맨스물'도 아닌, 퀴어가 등장하고 퀴어의 삶을 다룬 퀴어문학이다.

 

 

 

 

 

 

 

1) 텀블벅의 큐블리셔의 소설 프로젝트, '퀴어와 수사물의 절묘한 만남, <소프트 보일드 키튼>',  https://tumblbug.com/softboiledk

2) HEN, 「베르겔츠 고트」, 『소프트 보일드 키튼 1』, 큐블리셔, 2016, p.170. 

3) 위의 책, p.191~192.

4) 위의 책, p.245.

5) 위의 책, p.33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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