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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계간<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수록

 

소설은 주인공인 '박감독'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K감독 회고전의 GV에 초대된 그는 메인 게스트인 '오감독'의 들러리 역할을 부탁받았다. 주인공에 의하면 오감독이라는 인물은 아이돌과의 염문설을 흘리며 가짜 게이 힙스터 행세를 하는 재수없는 놈이었다.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동안, 박감독은 자신의 친구인 '왕샤'의 어깨에 기대어 졸기 시작한다. 샤넬 향수를 고집하는 그와는 자이툰 부대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그저 편한 친구와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그와의 추억은 마치 베일을 벗기듯 회상된다. 

 

동성애를 훈장처럼 전시하지도, 대상화해 신파로 소모해버리지도 않는 순도 백 퍼센트의 퀴어 영화를 만들리라. - 201p

 

영화과를 다니던 주인공은 원대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에서 개봉하는 퀴어 영화를 꼬박꼬박 챙겨보고, 실망을 거듭하면서 얻은 다짐이었다. 예술계에 종사하는 퀴어들의 마음과 목표는 비슷한게 아닐까. 어떤 장르이든 퀴어를 다룬 작품들은 비퀴어를 다룬 작품과 쪽수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다. 비퀴어, 이성애자들은 마치 인간의 디폴트로 지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퀴어를 소재로 하는, 퀴어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예술작품을 구상할 때 흔히 겪는 딜레마가 있다. 대상화의 기준은 뭔지, 비퀴어 영화와 뭐가 달라야 하는지. 절절한 신파로 퀴어를 소비하면 이젠 진부하고도 대상화 낭낭한 작품이 탄생하고, 그렇다고 퀴어인 인물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굳이 등장인물이 퀴어였을 '필요'가 있었냐고 물어본다. 더 나아가 별 볼일 없는 작품을 특별하게 포장하기 위해 퀴어인 인물을 집어넣은게 아니냐는 혐의도 지목된다. 그래서 퀴어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데?!

 

박감독 세대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렇게 별 고통 없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인물이 동성애자인 게 너무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너무 나이브하지 않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수자들이 왜 그런 말투를 쓰는 건지. - 221p

 

가짜 게이 행세를 한다고 소개되던(?) 오감독은 위와 같은 발언을 한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수자들'이면 발랄한 말투도 쓰면 안되는 것인가. '별 고통 없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인물이 동성애자인 게' 어째서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인가. 게다가 오감독의 영화줄거리는 정말, 흉물이었다. 고통과 신파, 아무튼 고통!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화 속에 퀴어를 등장시키려면 무조건 합당한,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 거였다. - 222p

 

왜 성소수자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해야할까. 얼마 전 퀴어포빅한 페이스북 게시글에 달린 (더) 퀴어포빅한 댓글을 본 적 있다. '게이들의 성생활'에 치료와 위생교육이 필요하다며 정성껏 영상까지 첨부한 댓글이었다. 그에게 남성 동성애자란 에이즈의 주범이고 나이를 먹으면 항문이 늘어나 변을 흘리는 존재였다. 자신은 혐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주장을 가져온 것이라며 우겼다. 오감독의 논리는 그 댓글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의 세상에서 동성애자란 '매일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해 익명의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 비참한 게이들인 것이다.

 

닥치세요. 제발.

지금 뭐라고 했어.

닥치라고 씨발.

어디서 욕질이야. 어린놈의 새끼가.

- 223p

 

그리고 우리에겐 독자를 대신해 오감독에게 한 방 먹이고, 소소한 복수를 해주는 주인공이 있다. 소소해서 눈물겨운 복수이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포부가 대단한 예술가 지망생은 소설 속에도, 소설 밖에도 널려있었다.

 

자기 연민이나 광기가 예술의 조건이었다면 우리는 이미 세계적인 예술가가 됐어야 했다. - 244p

 

유쾌한 실패자의 얘기는 언제 읽어도 재밌고 불안하다. 문학동네 가을호에 실린 이 소설과 함께, 릿터 7호(8/9)에도 같은 작가의 짤막한 소설이 실려있었다. 오랜만에 공감대를 자극하면서 시원시원하게 진행되는 스토리의 단편을 읽을 수 있어 정말 즐거웠다.

 

 

 

연홍 [沿銾]

dalmoon4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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