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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하는 시선 밖으로 ― 최윤, 『하나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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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혜 댓글 2건 작성일 16-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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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하는 시선 밖으로 ― 최윤, 『하나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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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표기는 도서출판 아시아에서 출간한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현대 소설 013> 참조

 

 

1

 

얼마 전 어느 식당에서 옆 테이블 커플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역차별’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억할 수 있는 짤막한 내용은 이렇다.

요새는 진짜 역차별 수준이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사람한테 티를 내지 말라고 하는 게 역차별 아냐? 그럼 지네가 티를 내지 말든가.

그 사람에게서 그 공간에 동성애자가 없다는 확신이 보였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단어로 퉁친 성소수자가 주위에 한 사람도 없다는 확신. 혹은 있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다는 생각. 그 순간 내가 너무 우스웠다. 나한테 하는 말도 아닌데 상처받은 것이 무엇보다 우스웠다.

 

 

2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하나코’는 서술자와 그 친구들이 어떤 여성을 암암리에 부르는 별명이다. 자신은 모르는 사이에 ‘하나코’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인물은 결말부에서 레즈비언이라고 암시되지만, 이 이야기는 레즈비언 경험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결국 정체성 패싱에 대한 이야기이다. 패싱이란, 주로 미국에서 인종간 혼혈로 태어난 사람들이 백인으로 착각되는 경험을 일컫는 단어였다. 넬라 라슨의 1929년 소설 <패싱>에서 잘 다뤄졌다.[1] 그러나 최근에는 인종만이 아니라 성 정체성, 종교, 장애 여부가 시스젠더/이성애자/그리스도교/비장애 등 해당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진 정체성으로 착각되는 것까지 일컫는 사회학적 용어로 자리매김했다.[2]

 

 소설의 제목 그대로 소설 속에 하나코는 없다. 그녀의 실제 이름이 하나코가 아니라 장진자인 것은 둘째치고, ‘하나코’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이 그녀에게 품고 있던 환상만을 대변하는 단어이지 실존하는 사람을 호명하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서술자가 대변하는 ‘그들’ 집단은 장진자라는 여성을 어떤 인물로 기억하는가? “키가 유난히 작고, 낮은 목소리로 그들의 대화에 무리없이 끼어들고, 이마를 왼쪽으로 기웃하면서, 가끔 논리를 벗어난 그들의 객기에 대해 진지한 표정으로 아주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는 여자”(20),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 같던 늘 똑같은 여자 친구(22)”를 데리고 다니지만 그녀의 일상사는 “한 번도 그들의 궁금증을 자극하지 않았(26)”던 여자. 미술 전공을 했다던가, 조각을 했다던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저 막연하게 다가오는, “이상한 힘(52)”으로 고해성사를 하게 만드는 여자.

 

 이런 식으로 특히 여성을 환상화시키는 묘사는 많은 남성 작가에게서 반복되어 온 내용을 여성 작가 최윤이 변주한 것이리라. 최근 영화 <건축학개론>, 소설 <은교>에서도 볼 수 있는 남성 주체에 의해 관찰되고 대상화된 여성들은 ‘쌍년’이거나 ‘소녀’가 되어 하나의 타입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박제된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것이 여자친구를 환상의 동물에 포함시키는 자조적인 유머와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유머에서 화자는 남성이고 화자에게 여성은 환상 속의 존재이다.

 

 

3

 

 그러나 실제의 장진자는 어떤 여자였고 어떤 여자인가? 고쳐 말하자. 그녀가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졌다는 것 외에 그녀는 어떤 특징을 가졌는가? ‘그들’의 눈에는 여자인 친구로 보였던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모임에 주기적으로 참여해 언제나 진심으로 말하고, 특징 있는 공간들을 잘 기억하는 사람.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취기를 가장해 성폭력 가해자로 돌변했을 때 그 자리를 떠났지만 다시 그들이 연락했을 때 도망치지 않는 사람. 그녀는 그들과 그녀가 멀어진 사건으로부터 몇 년이 지나 전화로 만난 ‘나’가 애가 몇이냐고 묻자 “나를 그렇게 몰라요?(76)”라고 묻는다. 즉 그들의 앞에서 장진자와 그녀의 ‘친구’가 이른바 ‘티’를 내고 있었음을,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시선 끝에 무엇이 혹은 누가 존재하는지를 보지 못했음을 혹은 보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서술자는 그녀가 수녀가 되었을까, 결혼을 했을까, 애가 있을까 까지도 의문을 품지만 그가 생각하는 가능성 중에 그녀 스스로 내비쳤던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장진자가 아닌 길 가는 어떤 처음 보는 여자를 보면서 생각한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질문이다. 혹은 길 가는 어떤 처음 보는 여자를 보면서 생각할 때도 이상한 질문이기는 하다. 이것은 이성애 중심 사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란 그러해야 한다고 지정된 기준이 허용하는 여성이 지니는 가능성의 범위이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좋아하는 것, 되고 싶은 것, 관심을 가지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가능성과 미래를 한정짓는 이러한 생각은,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장진자와 그의 연인에 대한 짤막한 기사문을 보기 전까지는 너무나 익숙해서 위화감이 없을 수도 있다. 애초에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의 시각을 벗어난 서사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눈을 빌려 쓰인 이 소설은 이 두 여자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주지 못하지만, 두 사람의 사업체를 소개한 짤막한 잡지 기사는 ‘그들’을 만나기 전에도 ‘그들’을 만난 이후에도 두 여자는 함께였고 함께일 것임을 암시한다. ‘그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했던 ‘하나코’의 여자 친구가 장진자에게는 인생의 동반자였다는 것은, 반대로 ‘그들’에게 장진자라는 사람의 존재 또한 있으나 마나 했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 여자를 그들은 단 한 번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 여자가 스스로 들려주고 보여준 것조차 기억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4

 

 이 소설의 훌륭함은 장진자가 그녀를 둘러싼 폭력적인 시각에 의해 패싱되는 경험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삶을 건강하게 살아냈다는 작은 지표들을 군데군데 심어둔 데에서 비롯한다. 환상의 동물이 아닌 나를 위해 마련된 온실은 없겠지만, 온실 밖에서 자라서 나는 비로소 나일 수 있다.

 

지혜

젠더퀴어 무성애자

fkvl0327@sogang.ac.kr

 

[1] 소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대신 적극적으로 패싱되기 위해 가족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모두 떠나 백인 남성과 결혼한 여성을 그녀와 우연히 다시 마주친 옛 친구의 시선으로 관찰한 내용이다.

[2] Koa Beck, “The trouble with ‘passing’ for another race/sexuality/religion”, The Guardian, 2014.01.02.

댓글목록

봄동님의 댓글

봄동 작성일

너무너무 읽어보고싶어졌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지혜님의 댓글

지혜 작성일

감사해요! 여러 번 읽어도 좋은 소설이에요&gt;&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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