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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리뷰 : 줄리 앤 피터스 <너를 비밀로> - 가장 리얼한 커밍아웃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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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배 댓글 0건 작성일 15-10-0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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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비밀로>(Keeping You a Secret)

줄리 앤 피터스, 이매진, 20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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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을 비밀로 감춰두고 있나요? 나를 진짜 나로 만들어주는 그 사랑을, ‘나중에’ ‘언젠가는’ 밝히겠지만 지금은 안 된다며 몰래 숨겨두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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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청소년을 위한 소설을 몇 편이고 써온 줄리 앤 피터스가, 이번엔 레즈비언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본격 커밍아웃 지침서를 써냈습니다. (라고 말하면 신작인 것 같아서 죄송해요. 원작보다 무려 12년 이후에 번역 출간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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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인공은 전부 다 가진듯한 고3 학생회장 ‘홀란드’입니다. 예쁘고 똑똑하고 수영도 공부도 잘하고 잘생긴 남자친구도 있지만 홀란드는 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좋아하거나 열광하는 것 없이 다른 사람들(특히 엄마)의 기대에 맞춰 무채색으로 살아왔죠. 그러다가 우연히 거울 속에서 ‘시시’라는 전학생과 눈이 마주치면서 모든 것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뀝니다. 시시는 ‘2QT2BSTR8(too cute to be straight, 이성애자이기엔 너무 귀여워)’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무지개 역삼각형 스티커를 가방에 붙이고 다니는 오픈리(openly)-레즈비언입니다. 언뜻 매우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은 초급 드로잉 수업에서 만나게 됩니다. 드로잉은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그저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는 시간. 그 방법을 배워가면서 홀란드는 자신의 시선이 가장 많이 가는 곳에 시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조금씩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홀란드는 성소수자 동아리를 만들려는 시시의 계획을 도와주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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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선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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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학교에는 커밍아웃한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시시가 내 눈을 바라봤다.

“글세, 동성애자가 한 명도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 애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홀란드. 눈을 떠.”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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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처음에 무지하기만 했던 홀란드의 시선은 시시를 만나면서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어있는 동성애혐오적인 괴롭힘이 보이고, 영 괴짜 같기만 했던 이복 여동생의 진국 같은 면이 보이고, 스스로의 차별적인 언행도 보입니다. 이제 홀란드는 바깥세상에서 원하는 대로만 바라보지 않고, 자기 안에서부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성소수자에게 작동하는 가장 일상적인 혐오의 방식이 ‘시선’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놓고 얘기하진 않더라도 마치 나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듯한 느낌. 나를 심판하고 추방하려는 것 같은 느낌. “최악은 내가 나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다는” 그 은근한 시선의 폭력 말이죠.(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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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시선들을 깨닫고 발굴하고 바꿔가는 와중에 홀란드는 시시와 열렬한 사랑에 빠집니다. 이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이 사랑을 누구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전 학교에서의 트라우마 때문에 시시는 홀란드에게 ‘벽장 연애’를 제안합니다. 졸업이 몇 달 남지 않았으니 비밀로 하자는 것이죠. 슬프게도 이 계획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결국 고통스러운 일련의 일들(이건 비밀로)을 겪은 후에 홀란드는 벽장에 있는 것이 너무나 괴롭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커밍아웃을 진행합니다. 주위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거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순서대로,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방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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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 뭘 비밀로 하는 일 자체가 내가 뭔가 잘못을 했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것만 같아. 나도, 너도, 우리가 서로 갖는 감정도 부끄럽지 않아. 온 세상이 다 알았으면 좋겠어. (중략) 나는 나 자신이고 싶어.”(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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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소설은 무조건 커밍아웃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커밍아웃하면 너도 세상도 모두 다 행복하다고 거짓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아주 솔직히 하나하나 보여줄 뿐입니다. 커밍아웃은 아주 어렵고도 지난한 과정이며, 그렇기에 ‘용기’일 수밖에 없다고. 그럼에도 해야 할 이유가 있긴 하다고. 실제로 홀란드의 커밍아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소중한 인연을 만들기도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 중에 많은 수를 잃거나 살아가는 환경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이처럼 커밍아웃으로 인해 얻고 잃는 것을 최대한 솔직히 보여주면서 실제 성소수자 청소년들에게 더없이 효과적인 지침서가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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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해서 미안하지만,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우선 ‘너를 비밀로’ 하겠다는 분들은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고민하거나 주인공의 커밍아웃을 보며 대리만족(?)할 수도 있고, 커밍아웃을 선택하는 분들에게는 온 마음을 다해 응원과 지지를 보낼 뿐입니다. 줄리 앤 피터스의 말처럼 커밍아웃은 분명 “길을 이끄는 불빛”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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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 @blueriox

퀴어문학 마니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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