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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리뷰 : 끝없는 애틋함이 주는 막연한 답답함 - 김세희, 『항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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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홍 댓글 0건 작성일 19-09-3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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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항구의 사랑을 읽고 몇 달이 지났다. 국제도서전에서 책을 한아름 사온 다음에 첫번째로 집은 책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어든 소설은 매우 빠르게 읽을 수 있었고, 웃음이 터져나오는 부분도 있었다. 장편소설이긴 하지만 책의 두께도 얇은 편이어서 앉은 자리에서 책장을 술술 넘겼던 기억이 있다.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참 많아서 솔직하게 쓰여진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야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고 미루고 미루던 신간 리뷰를 쓴다.

 

1. 그때 그 시절: 팬픽 이반에 대해

 

 교사들은 누워 있는 행위팬픽 읽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사실 그들이 금지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은 그게 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동성애를 금지한다고 쓰고 싶었을 것이다. 학교마다 동성애를 단속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이 우리 집단 안에 정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어서였을까? 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p.26-27

 

 내 소원은 교내 연애였다. 대학교에 와서 캠퍼스 커플이 되었으니 소원을 이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교내 연애는 교복을 입고 하는 교내 연애였다. 15살 즈음 한창 정체화를 하면서 사귀었던 친구는 논외로 두고, 여자 고등학교를 다녔어도 연애는 늘 학교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여고생들의 사랑이 정말 궁금했다. 그리고 항구의 사랑을 읽으면서, ‘렛세이에서 읽은 에세이를 떠올렸다 ( https://blog.naver.com/letssay_q/221495869112 ). 여학생들의 교내연애가 등장하는 소설은 이전에도 읽은적이 있었다. 하지만 팬픽이반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결이 다른 이야기였다. ‘팬픽이반은 그냥 이반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 팬픽이반이라는 단어는 더 부끄럽고, 그래서 더 내밀한 이야기와 고민을 담은 단어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더 기대를 담아 읽었던 것 같다.

 항구의 사랑에도 팬픽 얘기가 분명히 나온다. 심지어 소설의 주인공인 준희의 팬픽 취향-C를 사랑하는 BA에게 감금당해 섹스(강간)를 당하다 A를 사랑하게 되는-까지 나온다. 그런데 왜일까, 이 소설에서 팬픽이반은 그다지 맞닿지 않은채 서로 겉도는 느낌을 준다. 팬픽이 어떤 식으로 정체화에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팬픽 문화에 빠진 아이들이 어떤 심리로 동성애라는 역할놀이를 수행했는지 하는 의문이 남았다.

 

그 시절의 일들이 내가 스무 살 이후 들어간 세상에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자랑스레 떠들 일은 아니었다.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 말한다 해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일. 어쩌다 언급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은 그 일들을 바보같이 여긴다는 뉘앙스를 담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p.51-52

 

 고등학생 시절의 사랑을 회상하는 소설인 만큼, 준희의 터닝포인트는 바로 대학교 입학이다. 준희에게 대학교란 가부장제와 이성애를 토대로 공고히 지어진 거대한 사회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온 준희는 그 안에 편입되기 위해 더더욱 노력해야 했다. 대학교에 들어가 서울 아이들과 하이힐을 신고, 화장을 하고, 남자 얘기를 하고. 과거의 자신을 부정해야 했던 준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마음은 인희에게 향하던 준희의 날카로운 시선을 어느정도 설명해주는듯 하다.

 

2. 첫사랑: 민선 선배는 과연 헤테로였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103

 

 작중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사건은 역시 준희의 첫사랑이다. 민선 선배를 향한 준희의 절절한 마음에 나 또한 덩달아 설레는 마음으로 소설을 읽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의 연극부 선배라니, 사랑에 빠질만한 캐릭터 아닌가? 준희는 민선 선배와 함께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서 남몰래 질투하고그러다 결국 바닷가에서 그녀에게 입을 맞추게 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몰랐다고 한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자신을 향해 그런 마음을 품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해 본 적이 없다고. 만약 알았다면 자신의 행동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내게 미안한 마음도 느낀다고 했다. 거짓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지만, 어쨌거나 이것이 그녀의 최종 입장이었다.

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p.105-106

 

 아니나 다를까, 준희는 차인다. 차이고 나서도 준희는 여성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서술이 있다. 민선 선배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미지를 가진 여성들이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매력이 식었다는 것도. 그리고 후에 의미심장한 대목이 한 번 더 등장한다. 바로 인희의 대사이다. 작중 인희는 준희에게 민선 선배에 대해 물으며 그녀가 레즈비언이 맞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인희의 게이다(gaydar)를 믿고 싶다.

 

 “보면 알아. 내 친구들도 그렇게 얘기해. 그 선배, 아마 너 때문에 엄청 흔들렸을 거야.” 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114

 

3. 커밍아웃의 무게: 인희는 그냥 유치한 부치인가?

 

인희는 데미안을 읽은 뒤 내 안에서 변형되었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처음에 인희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 정도로 인희는 달라져 있었다. (중략)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짝다리를 짚고 선 모습은 꼭 남자 같았다. 그 애는 거드름 피우는 또래 남학생들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17

 

 소설 전반에 등장하는 인희는 초등학생 시절의 회상을 제외하면 준희에게 매우 신랄하게 까이는존재이다. 준희는 칼머리를 하고, 힙합바지를 입고, 건들거리면서 자꾸만 남자 역할을 하려고 하는 인희를 부끄럽게 여기고 경멸한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 만났을 때엔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은근하게 어필하고, 속으로 인희를 깎아내린다. 인희는 그저 과거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유치한 부치인 것이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나는 인희의 시선을 피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땐 다 미쳤었어.”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150

 

 결국 준희는 자신의 세계에서 인희를 매몰차게 쫓아낸다. ‘미쳤었다라는 표현과 함께. 어떻게 보면, 준희가 인희를 보는 시선에는 자기혐오가 섞여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희는 자신보다 어른스러운 친구를 동경했고, 대학교에 와서는 서울에 사는 헤테로 여자들 무리에 끼어서 남자와 연애를 하는 것에서 안정을 찾았다. 그런 준희에게 인희는 과거에 매달리는 한심한 아이였을지도 몰랐다. 인희는 준희와 반대로 대학에 와서도 여자 선배에게 고백을 했다고, 그래서 소문이 났다고, 여자 동기에게 키스를 했다고도 하는 사연을 줄줄 털어놓는다. 준희는 그 얘기를 들으며, 그저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만 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준희는 인희에 대해 회상하며 아주 짧게 반성을 한다. 그건 준희가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였다.

 

학교 다닐 때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후배들의 숭배를 받고, 하지만 대학에 가면 완전히 세상이 뒤집히죠. 저도 처음에는 말하고 싶어서 온몸에 좀이 쑤셨어요. 나 좀 다른 애야, 그런 거요. 갑자기 평범해지는 걸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새로 알게 된 사람과 술을 마시거나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만 되면 입이 근질거렸어요. 그러다 몇 번 쓴맛을 보면서 서서히 입을 다물게 되는 거죠.”

(중략)

그 인희라는 친구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아마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을 거예요. 어딘가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안경 만드는 기술을 배워 외국에 나가서 신나게 살고 있으면 좋겠네요.”

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p.164-166

 

 준희는 자신에게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한 H를 만나서 인희 얘기를 한다. 그리고 H는 위의 인용문과 같은 말을 한다. 여기서 나는 그만 소설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무리 준희와 인희의 고등학생 시절 문화가 동성애에 미쳐있었어도 커밍아웃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H만 해도 심사숙고해서 4년만에 준희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과연 인희에게 커밍아웃이 나 좀 다른 애야같은 의미가 될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지 않은 사람이며, 외국에 나갈 생각도 없다. 나에게 있어 커밍아웃은 어떤 경고가 되기도 하고 확인절차가 되기도 하며 정치적 선언이 되기도 한다. ‘쓴맛을 본다고 해서 입을 다물 생각은 여전히 없다. 혹은 그 사이에 사회가 변했다고도 생각한다. 나는 세대차이를 느끼는 걸까? 혹은 아직 사회의 쓴맛을 덜 본 걸까? 입을 다물 사람은 누구인가?

 

 소설을 읽고나서 준희보다는 인희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인희의 첫사랑으로 알려진 준희를 찾아왔던 아이들에 대한 문장을 떠올렸다. 준희가 디나이얼 민선 선배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준희는 인희에게 그와 비슷한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선 선배도 디나이얼이고, 준희도 디나이얼이다! 가엾은 인희는 타자가 된 채로 소설 밖으로 퇴장했다.

 

4. 준희에게 궁금한 점

 

상미는 3년 전 광주 소재 한 대학의 연구원과 결혼했고, 재작년에는 아들을 낳았다.

가끔 궁금했다. 상미는 열여섯 살 때 여자를 보고 가슴이 뛰어 고민했던 일을 기억할까?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44

 

 중학교 3학년때 나의 커밍아웃을 들어주었던 상담교사는 내 손을 잡고 기도했고, 내가 아직 청소년이라서 그런 것이며, 자신도 학창시절에 여자친구들끼리 스킨십을 했다고 말했다. 언젠가 지독한 첫사랑 끝에 엄마에게 커밍아웃 했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여자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런 애들을 봤는데, 지금은 애 낳고 잘 살고 있다고. 그리고 그 이후로 나의 커밍아웃에 대해서는 없는 일처럼 여기셨다. 이런 사소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리뷰에 써야하나 싶지만, 이런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확실한 건 이 소설이 당사자 독자에게 큰 아쉬움을 남긴다는 점이었다.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해서 나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한때 어찌어찌 일어난 일, 이제는 지나간 일로 여겨졌다. 나는 그때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 맞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_김세희, 『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p.153

 

 나는 준희가 남자친구에게 남자들도 고등학교를 다닐 때 사랑을 고백했냐고 물어보는 부분에서도, EBS 특강 영상을 보다가 성욕을 느끼는 부분에서도, 자꾸만 어떤 부분에서 턱 턱 걸리는 위화감을 느끼며 읽었다. ‘나의 여자 친구들에게 이 책을 꼭 선물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최은영의 추천사도 의미심장하다. ‘놀라움과 감탄속에서 여성애자로 정체화하는 이야기라니. 그리고 준희는 정체화도 하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할까. 디나이얼 바이? 물론 인물의 성정체성 및 성적지향을 꼭 명명하고 분류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정치적 함의는 배제한채 보편적인 경험으로 끌어들이는 것. 나는 항구의 사랑에서 그런 것을 느꼈다.

 

 물론 항구의 사랑은 항구의 사랑만이 담을 수 있는 것을 담고 있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압박을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 생활의 간극에 담아내고, 한 시기를 거쳐오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담아냈다. 사회 비판적인 부분과 함께 세세한 감정이 잘 드러났다. 이런 소설이 현재 한국 문단에 필요하다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쓴 작가의 마음이 후련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박한 문장 투성이지만, 이것도 고르고 고르다 쓴 것들이었다. 여성이자 양성애자, 정신질환자로 살아가면서 나만 불편한가?’ 라고 생각한 적이 무척 많았던 것 같다. 그것은 하나의 가려움이었다. 불편함의 이유를 납득 가능한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올 때까지 지속되는 찜찜한 가려움. 그리고 나는 항상 그것을 정돈된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애를 쓰고, 동의를 갈구했던 날들을 보냈다. ‘항구의 사랑에 대한 많은 리뷰를 훑어보면서 가려움은 점점 심해졌다. 모두가 아련하고 애잔한 톤으로 자신의 학창시절을 회상하고 있었으니정말이지 소외감을 느꼈다. 그러니 이제 동의를 구하기보단, 그냥 말해보고 싶다. 그리고 나의 글이 누군가의 가려움을 해소했으면 좋겠다.





연홍 [沿?] 

dalmoon4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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