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 등장하는 연극 ― 기준영 장편 『우리가 통과한 밤』 > 전지적 퀴어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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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만 등장하는 연극 ― 기준영 장편 『우리가 통과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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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북극곰 댓글 0건 작성일 18-11-12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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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영, 『우리가 통과한 밤』, 문학동네, 2018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모습을 보고있는 것일까. 그 사람은 나의 어떤 모습을 사랑할까. 내가 가진 모든 모습을, 그 사람이 가진 모든 모습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까. 연애를 하다 보면 문득 갖게 되는 의문들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조잘조잘 내 이야기를 하는 쾌활한 사람이고 싶다가도, 가만히 말을 들어주는 친절한 사람이고 싶고, 때로는 둘 다 해내지 못하는 우울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모습이 나이기도 하면서, 어느 것 하나 내 모습으로 특정 지을 순 없다. 결국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또 보여주지 않으면서 끊임없는 연극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통과한 밤>의 채선과 지연 역시 각자의 일면을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으면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 지연은 맡은 일을 꼼꼼히 해내는 엘리사벳이 되었다가, 활달한 얼굴을 한 리사가 되기도 하고, 조용하고 단정한 지연이 되기도 한다. 채선 역시 그런 지연에 맞춰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마고가 되었다가, 용건만 간단히 하는 무뚝뚝한 채선이 된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거실의 소파 일부가 보였고, 지연이 앉은 자리에서는 유리잔이 진열된 싱크대 위의 선반이 바라보였다. 지연이 내 주의를 끌기 위해 고개를 갸웃하며 “있잖아요’하고 말머리를 길게 끌 때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걸쳐놓은 지연의 붉은 케이프 자락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래서 지연은 그때마다 내게 닿지 못한 제 말들이 유리잔들 사이를 배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아니, 그 모든 건 그저 나에게 선택적으로 남아 있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날, 그 저녁 식탁의 분위기를 계속 복기하려는 내 노력이 그 풍경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어서인지도. 어긋남과 이어짐, 따뜻한 음식과 찬 음식, 깨지기 쉬운 것들과 깨지지 않는 것들, 붉은 것과 투명한 것이 공존하는 저녁 어스름의 한 순간.


 채선은 그들이 통과한 밤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드러난 부분과 의도적으로 숨겨진 부분, 숨겨진 것들은 유리잔처럼 투명한 것에 담겨 금방이라도 떨어져 깨질 것 같은 긴장을 만들지만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은 긴장감을 준다. 이런 긴장 속에서 채선과 지연은 끊임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마고와 리사와 엘리사벳을 발견해나간다. 그리고 서로의 면면들을 알아가면서, 긴장은 약해지고 관계는 기존의 균형을 잃고 새로운 균형을 쌓아간다.


나는 매 순간 지연의 이야기를 듣기 좋은 자세에 관해 의식했다. 언제나 충분히 부담을 덜어내고 들을 수 있어야 했다. 시소를 타는 것처럼 내 무게로 한 자리를 지켜내면서 오르락내리락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균형을 잃어갔다. 지연이 가라앉아있으면 나도 그리로 떨어져내렸다. 내가 뻗대며 뒤로 물러나면, 지연의 존재, 그에 얽힌 사물과 소리들이 내게로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도망가지 않은 것이 내 실책이자 애착의 지점이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상에 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 사람의 과거를 듣고 현재를 함께하며 미래를 그려보는 것. 처음에는 긴장 속에서 선택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골라 보여주던 채선과 지연도, 사랑하는 연인들이 그러하듯, 서로의 세상에 쏟아져 들어갔다. 결국 채선은 지연의 세상에 들어가 과거의 엘리사벳을 만났고 지금의 리사를 보며 미래의 지연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는 그 모든 모습이 지연이고, 자신은 지연의 모든 모습을 사랑하는 것임을 점차 깨달아간다.


 채선과 지연, 그리고 나와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은 결국 끊임없는 연극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저렇게 나를 보여주면서도 상대방이 보여주는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는 이 연극의 끝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이들이 채선과 지연처럼 서로의 무든 것을 보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연극을 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소설 초반에 채선이 마지막 연극의 커튼콜을 올리며 느낀 감정과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적어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건 분명 괜찮은 연극이다.


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마치 작은 무지개를 그리듯이. 나를 둘러싼 대기와 내가 일시에 팽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폐가 부풀어오르고 혈관에 빠르게 피가 돌면서 발끝이 살짝 들리는 기분. 나는 가늘게 휴, 더운 숨을 내뱉었다.







김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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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잘 못해도 연극은 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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